[렛츠리뷰] 채굴장으로

이노우에 아레노 지음, 권남희 옮김 / 시공사


"터널을 파나갈 때 제일 끝에 있는 지점을 채굴장이라고 합니더. 터널이 뚫리면 채굴장은 없어지지만, 계속 파는 동안은 언제나 그 끝이 채굴장이지예."

초등학교 양호교사 세이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섬에서 남편과 온화한 일상을 보낸다. 세이에게 섬은 확장된 의미의 가정처럼 보인다. 섬 사람들은 모두 그녀와 친숙하고, 독거노인 시즈카 씨는 친할머니처럼 살가운 사이다. 남편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족이 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비록 '반쯤'이라고는 해도 섬에서 함께 성장했기 때문에 세이에게는 이중으로 연결된 가족이다. 젊은 날에 그녀는 잠깐 본토에서 살기도 했지만 아버지가 죽고 천애고아가 되자 기어이 섬 출신 남자를 선택해서 섬으로 돌아왔다(남편의 청혼은 "함께 섬으로 돌아갈래?"였다). 아버지가 쓰던 진료실은 이제 화가인 남편의 작업실이다. 이보다 더 안심되고 익숙한 장소는 세상에 없다.

세이처럼 발 붙이고 살 곳, 정 붙이고 살 사람이 있다는 것도 축복이지만 평생 한 곳에서 한 사람과 살자면 스스로 날개를 잘라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. 이따금 남편이 일로 며칠 집을 비우면 세이는 섬 여자라는 정체성을 은밀히 부인하고 싶은 듯 '도시 여성의 아침식사' 시리얼과 커피로 향수를 달래지만 "작은 볼 한 그릇 분의 시리얼은 아무리 천천히 먹어도 금세 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."

세이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섬 출신이 아닌 여선생과 남선생이 있다. 유부남 '본토' 씨와 떠들썩하게 연애를 하는 동료교사 쓰키에. 그리고 도쿄에서 새로 부임한 남자교사 이사와. 그들은 섬 사람들과 사뭇 이질적이다. 쓰키에는 '섬 여자'와 자신을, '아내'와 정부(情婦)를 엄격하게 구분한다. 반면, 이사와의 이질성은 좀더 모호하다. 어쩌면 다른 섬 출신인 것 같기도 하고, 어쩌면 죄다 거짓말인 것 같기도 하며, 시즈카 씨나 아이들을 잘 따르는 소탈한 사람 같기도 하지만 '양파처럼' 벗기고 벗겨도 민낯이 드러나지 않는다.

세이는 이사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 자기도 모르게 표준어를 쓴다. 섬에 뿌리 내린 유부녀라는 자기 정체를 숨긴 양, 세이는 그 사실이 못내 찜찜하다. 그 첫 만남 직후의 고백은 묘하다. "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아직 만 하루가 남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. 나는 예전보다 더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." 감정이 노골적인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 방어벽을 구축하고 싶었던 걸까. 이사와와 찻집에 갈 뻔했을 때에도 세이는 "솔직히 안도했다. 나는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"라고 말한다. 여자의 예감이다. 최초의 순간에 여자는 벌써 자신을 붙잡아줄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꿰뚫어본다. 미묘한 여심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에 이따금 어머나, 소리가 절로 나온다.

세이는 이사와가 신경이 쓰인다. "당신은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습니까?"라고 묻는 이 젊은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길 수 없다. 그러나 관계는 얽히고설킨다. 세이는 쓰키에가 아니다. 그녀는 결코 섬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. 본인도, 쓰키에와 이사와도, 아무 말 없이 존재감만 행사하는 남편도 그 사실을 안다. 따라서 결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대로다.


개인적으로, 세이가 임신을 확인하고 나무십자가를 땅에 묻는 마지막 장이 가장 설득력 있게 와 닿았다. 이제 그들 가정과 섬에는 새 식구가 늘 것이다. 그것들은 세이를 전보다 더 공고히 차지하며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.

그러나 억압된 것은 언제 어느 때 '미시루시'처럼, 음몽 속의 잠꼬대처럼 되돌아올지 모른다...

* 입담 9단 이야기꾼들에게 좀 질린 터라 오랜만에 행간에 농밀한 감정을 녹여낸 소설을 읽으니 신선했다. 인물이 하지 않은 말, 하지 않은 행동이 더 묵직하다. 좀더 세밀하게 읽고 싶은 충동도 느꼈지만... 렛츠리뷰는 왜 항상 내가 죽도록 바쁠 때만 당첨되는 걸까. 이제 응모하지 말아야지.

* 보름 전에 김 달인은 '렛츠리뷰 상품발송' 스티커가 붙은 택배를 건네주며 "자승자박이로구나"라는 한마디를 남겼다. 나 정말 알기 쉬운 인간이구나... ;;;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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by avril | 2009/06/09 10:24 | Revue | 트랙백 | 덧글(2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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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by 마술봉 at 2009/06/10 15:28
자승자박이 아니고, 자승사강인 avril인 게쥐요~
이런 섬세한 소설 무척 좋아하는디, 사놓고 정말 행복하고 한가로운 시간에 읽으려고 아끼고 있었다. 근데 그런 시간이 쉽게 오지 않네....
Commented by avril at 2009/06/12 10:35
이젠 무슨 책을 봐도 쫓기는 기분... -_-;;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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